오랜만에 본가에 간 날이었다. 두 달 만이었던가.
내가 한참 방황하고 소리 없는 우울에 빠져있던 때라 그랬는지 아빠와의 대화에서 생긴 작은 마찰이 금세 말다툼으로 번져있었다. 아직도 어느 지점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가 흥분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까. 내 감정이 고조되던 순간 아빠의 한마디가 소용돌이 치던 내 속의 감정의 홍수를 그치게 만들었다. 홍수 같은 날들로 넘쳐흐르던 불필요한 감정의 홍수를 막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이었다.
아빠는 늘 그런 식이었다. 늘 그런 식으로 날 구했다. 아빠는 모르겠지만 나는 몇번을 그렇게 구조됐었다. 이유를 알 길 없는 묘연한 슬픔으로부터.
"윤지야, 감정에 지지 마."
아빠가 말했다.
갑자기 아주 작은 오존층 너머의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소행성 혹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운석 하나가 불가항력적인 모든 것을 뚫고 내게로 돌진해 버린 것이다. 마음을 추스를 새 없이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얕게 일던 반항심도 잠시 빛이 반짝였다. 내 안에서 작은 씨앗이 움을 틔웠다. 아빠가 그 씨앗을 발아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겨울잠을 자던. 어쩌면 평생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지 모를 씨앗이 아빠의 문장으로 인해 내 속에서 피어나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지부진했던 며칠 몇 주간의 나를 단번에 건져올렸다. 그도 그럴 게 나는 그동안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은 정처 없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한강진 역을 주변을 오래 걸었는데 외로움이 더 쌓였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다정한 연인들. 모든 것들에서 아름다움과 외로움 한 줌을 얻었다. 아름다움은 금방 증발했고, 외로움은 누적되었다. 집에 돌아와 잠깐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눈물이 흘렀다. 한번 물꼬를 튼 눈물샘이 멈출 새 없이 크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게 눈물이 흐르니 마음까지 아려지는 게 아닌가. 마음이 아리니 눈물이 더 흘렀다. 혼자가 아닌 방에서 숨죽여 울던 버릇이 혼자가 되어서도 숨죽여 울게 만들었다. 누구에게 들킬 일 없는 눈물인데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피부 위가 쓰라리도록 오래. 눈물이 흘러 가슴을 타고 긴 팔을 타고 흘러 손끝에 맺히도록. 그런 날들이었다.
무심코 던진 말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일처럼.
어떤 말은 또 사람을 구원하기도 한다.
나는 실로 감정적인 사람이다. 아빠의 말로 나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감정에 약한 사람인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싸워보기로 했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감정들에게 지지 않기로 했다. 열 번 중에 다섯 번은 이겨보자고. 차츰차츰 이겨내 보자고. 매번 이길수도 없겠지만 매번 무너지지는 말자고 말이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작은 희망이 생겼다. 아빠로부터 움튼 삶의 희망. 인생이 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매번 그러길 바랐다. 그만두고 싶었을 때, 그만 아침을 보고 싶었을 때도. 잘 살고 싶은만큼 그만하고 싶었으니까. 아마도 이 생애에서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을 절망과 희망을 함께 가지고 가야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