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 01
엄청난 생명력. 어느 날 지구에서 가장 강한 생명을 지닌 것이 식물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일까 가꿔지지 않은 원시림 상태의 곶자왈이 본연 식물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아름다웠다.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서. 구불구불 거친 길들 모두 나무와 풀들이 애쓰고 있다는 것이, 저마다 애쓰면서 살아보겠다고 나무를 타고 올라긴 덩굴들도, 돌을 내치지 않고 품어서 올라간 나무도.
다듬어진 아름다움이 아닌 태어난 대로, 애쓰는 대로, 살아가는 대로 갖가지 형태로 구부러진 가지들이. 원래의 모습을 알기어렵도록 형태를 바꾼 식물들도 여럿 보였다. 가시나무인데 아래쪽엔 가시가 하나도 없는 것이, 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뻗어나가기 위함. 가시를 없애고 근처 나무에 기대어 가시가 있던 가지의 몸통을 잔뜩 키워서는 가지에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매끄러운 가지가 된 것이다. 사람의 삶도 식물과 비슷하지 않은가 싶었다. 우리도 살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고, 성장을 위한 변화를 끊임없이 도모하고 있지 않은가. 생명의 삶은 본질적으로 비슷하겠다만, 형태는 달라도, 삶의 방식이 달라도 생을 이어가기 위해 저마다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연과 그 속의 사람들이 한껏 애틋해졌다. 하루를 살아가는 모두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고통의 흔적이 아픔이 아닌 시련을 견뎌낸 멋진 훈장으로 여겨지길 바라게 됐고.
생명의 삶은 고통이 수반되지만 다들 살아보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애쓰고 있구나. 해설사 선생님의 이야기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 참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여기서 제일 오래되었던 소나무인데 몇 해 전 끝을 맞이했어요. 그땐 이 숲도 끝이구나 싶었는데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거였더라고요."
부러진 나무 주변으로 새순들이 마구 올라와 있었다. 삶을 떠올리면 왜인지 시련과 고통만 가득히 떠오르던 머릿속에 자그맣게 환희가 움트던 순간이었다. 처음엔 맥없이 부러진 나무가 슬퍼 보였다가 주변으로 꼿꼿이 피어난 식물을 보니 끝은 또다른 시작과 탄생이라는 것을, 너무 당연한 이치를 놓치고 삶의 그늘만 챙겼던 내가, 늘 그늘 속에서 숨어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자연의 순환이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데. 나는 끝만 바라봤었구나.
가끔 져버리는 순간에도 다시 피어날 것을 잊지 말 것. 어쩌면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으니 깊이 상심치 말 것. 무너지는 순간에는 흠뻑 무너져서 새롭게 피어날 마음의 양분이 되어 응원하기. 나를 너를 우리 모두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