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낙엽을 타고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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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 이날의 일기를 끝으로 노션을 열어 글을 써보려는 것이 0211인 게 혼자 신기하고 좋았다. 반복되는 숫자를 괜히 좋아한다. 마치 행운을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다. 숫자 3이라던가 8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3은 두개의 아치를 이은 것 같고, 8은 0을 붙여 둔 것 같으니까. 눈사람 같기도 하고. 아무튼 뜬금없이 글을 쓰려다 기분이 좋아진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다. 하루 내내 고독한 사람이었다가 이렇게 사소한 것에 혼자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어제는 구정이었고, 본가를 다녀왔다.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 면회도 다녀왔다. 할머니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셔서 좋아보이셨다. 할머니와는 큰 유대랄 것이 없어서인지 타인 같다가도 가족들이 한데 모여있으니 가족 같았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껴야 할 것 같은. 그렇지만 그러지 못해서 괴로웠다. 낯선 병실에서 마뜩잖게 애써 웃고 있을 뿐. 안타까운 마음도, 애틋한 마음도 들지 않은 내가 이상한건가 싶어 내내 괴로웠다. 마스크를 써야만 면회가 가능한 것이 다행처럼 여겨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웃음이 영 시원찮다는 게 드러났을 테니까. 외할머니, 친할아버지, 친할아버지. 모두 내 기억 속에 없다. 다들 뭐가 그리 급하셨을까.
그나마 내가 기억하는 건 아주 어릴적 외할아버지의 장례식과 외할아버지가 빗자루로 놀아주셨던 날. 내가 처음 죽음을 마주했던 때였기도 하고 내게 삼촌이 있구나 싶었던 날이기도하다. 솔직히 그날이 꿈만 같아서 꿈인가 싶기도하다. 엄마와 삼촌이 관계가 좋지 않아서 들은 이야기도 없고, 그날 이분이 삼촌이라고 들었던 목소리만 기억난다. 그후로도 엄마가 삼촌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가 삼촌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서 여전하게 물어보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젠 정말 꿈 같기도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말 내가 꿈 속에서 들은 일인데 너무 생생해서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가물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엄마는 검은 상복을 입었고 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엄마가 왜 우는지 몰라서 엄마 왜 우냐고. 물었던 기억만 난다. 죽음이 뭔지 몰라서. 외할아버지가 죽었는데 엄마가 왜 우는지. 멀리갔다고 했는데 멀리가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근데 왜 울지. 다시 만나면 되는 건데. 했을 뿐. 우리가 다시는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줬다면 슬펐을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은 둘 뿐인데. 하나가 그때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도 중학생 때. 어른도 운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바보 같이 어른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철없는 중학생이었다. 스물여섯인 지금도, 철이 든지는 모르겠다만 그때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내가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순진무구함이 갑옷처럼 나를 무장했을 때였으니까.
친할아버지와의 기억은 단 하루의 기억만이 전부인데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할아버지의 사랑이 여전하게 내 기억 한 편에 진하게 남았다. 한참 꼬맹이던 나와 빗자루로 놀아주셨던 할아버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고, 내내 애틋하고 사랑이 전해지는 목소리로 나와 놀아주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나는 할아버지한테 부모님한테 그러지 못했던 투정도, 애교도, 어리광도 피웠을 텐데. 내가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인생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물어봤을 텐데.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봤을 텐데. 그랬을 텐데. 편찮으신친할머니를 보러가서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내가 별로인걸까. 대가 없는 사랑을 처음 느끼게 해 줬던 할아버지 였으니까. 짧았지만 그 기억이 오래 남아 나를 구해주니까. 할아버지처럼 나를 아주 사랑하고 예뻐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이마저도 미화된 것이겠지만 이렇게 명징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의 사랑이 내게 아주 와닿았다는 것이니까. 그만큼 따스했다는 말이니까. 그렇게 조금은 싱숭생숭한 구정을 보내었다.
오늘은 일찍일어났지만 침대 위에서 오래 뒹굴거리다 일어나 하루를 무겁게 깨웠다. 오후 1시에 당근으로 안 입는 코트를 저렴하게 넘기고, 지난주에 예약했던 전시를 보러 세화 미술관을 다녀왔다. 인공지능과 인간에 관한. 인공지능이 만연한 세상 속 인간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 전시. 그러나 인간이 역시 인공지능이 우리의 말을 거역하고 지배하게 놔둘까? 생활의 편의를 넘어 위협이 된다면 결국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제일 우월해야만 하니까. 그러고 싶을 테고, 그래야만하니까. 인간을 위해 인공지능을 만들었고, 사용할 테니까.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서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똑똑할 수는 있어도 기계가 사람을 부리는 일을 과연 허용할까. 인간이 기계를 부려먹어도, 기계가 인간을 부려 먹는 장면을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너무 발전해버리는 탓에 인간이 멍청해지고 다룰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 기계에 의존해야만 살 수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다. 영화 월 E에서 보았던 장면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과학은 한쪽으로만 발달하는 게 아니니까. 분명 인간은 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종국엔 모두가 예쁘고 잘생기고, 똑똑해져서 특색이 사라지는 세상이 올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도 잠깐해보지만 어느 시대에나 개성은 존재하고 누군가는 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인지라 그러지도 않을 수 있겠다. 어떻게든 그 안에서 새로움과 신선함을 찾아 뽐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엔 개성, 남들과 다름이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닐까. 유행이 돌고 돌아도 누군가는 돌고 도는 유행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리더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세화 미술관은 처음 와 본 미술관이었고, 오랜만에 광화문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자주 찾긴해도 그 근처를 둘러본 적은 크게 없어서 낯설었고, 망치를 들고 서 있는 헤머맨 조각상이 세워진 바로 옆 건물이 여기였구나 싶었다. 금방 볼 줄 알았던 전시는 1시간 넘게 보았고, 늦게 올까 싶었는데 먼저 오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근 하러 나왔을 땐 봄같아서 얇게 입고 나왔는데 영화처럼 눈이 내렸다. 생각보다 펑펑. 좀 웃겼다. 봄인줄 알고 얇게 입고 나왔는데다가 입춘도 지난 이 시점에 눈이라니.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날씨 앱을켜니 날씨앱에도 눈 소식은 나와있지 않다. 나 꿈꾸고 있나. 여러모로 재밌었다. 삶이라는 게 가끔 이런 이벤트를 줘서 재밌는거지 싶었다. 10분 전만해도 오순도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예쁜데 홀로 외로워하는 것이 역시 고독하다는 생각에 눈물 글썽였던 사람이 말이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를.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싶은 것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은 것도 아니고 혼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아무쪼록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얇게 입고 나온 탓에 미리 생각해본 루트를 모두 철회하고 마침 건물에 씨네큐브가 있길래 영화를 예매했고, 근처 카페에 와서 책을 읽고, 이 긴 글을 쓰고 있다. 현재 시각 오후 6:32, 40분 영화라서 나머지 기록은 영화를 보고와서 이어나가야겠고, 또 영화를 보고나오면 늘어놓고 싶은 말이 많아질 테니 오늘 기록은 제법 늘어질 것이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본 영화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인데 로맨스 좋아하는 인간에게 얼마나 자극적인 제목이었는지. 영화는 인물 간에 대화가 많이 없지만 충분히 이해하기 쉬웠다. 라디오에서는 쉴새 없이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두 남녀는 열심히 일을 하고, 조금은 쓸쓸한 퇴근길을 맞이하기 일쑤다. 고독함을 느끼다 어느 술집에서 서로를 마주하면서 서로를 궁금해하기 시작하고, 드라마처럼 잘 이어질 것 같다가 엇갈리기도 하고 가치관 차이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는 스토리다. 사랑 이야기가 어쩌면 거기서 거기이지만 또 그 사랑이 어느 상황이 놓여있고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것이 관건이니까. 그 속의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것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니깐. 영화의 소감은 귀엽고 빈티지한 사랑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철저히 현실적이고 절망적이고 불행하다가도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 시련들을 둘은 겪어야했으니까. 나라면 영화 속 상황에서도 사랑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 사랑에도 힘이 필요하다. 사랑을 지탱하는 힘이. 시련을 견뎌 낼만큼의. 나였다면 역시 잘 모르겠다. 사랑이 버거워 고독을 택했을지. 고독이 더 괴로워 힘든 사랑을 택하고 견뎌냈을지. 어쩌면 사랑이라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랑 속에 내가 없어서 감히 지레짐작을 못하겠을 뿐. 이전엔 사랑을 자주 소망했었는데 요즘엔 어쩌면 오래 고독하겠구나 싶다. 어느 옛날 외로워 보이던 어른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역시 희망을 품어본다. 나의 사랑에 대해서. 다시 벅차게 사랑할 수 있을 언젠가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