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톺아보는 올해 초의 기억과 날 것 그대로의 사진.
속초 그리고 고성에서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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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기 전 잠깐 경유하는 곳에서의 순간. 기다리던 아저씨께서 아주머니를 기다리다 버스가 보이자마자 사람 좋은 미소로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주머니를 아주 환한 미소로 배웅하고 곧장 짐을 받아 드시곤 함께 차로 돌아갔다. 영화처럼 느껴지던 장면. 내게는 없었던 순간이고, 없을 것 같은 장면이라 그런지 그 짧은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머무르다 지나갔다. 여성을 기다리던 중년 남성의 홍조를 띤 불그스름한 볼과 환히 웃던 미소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둘은 어떤 관계이고 누가 봐도 행복해지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12:22
어제만 해도 우중충하고 비가 옅게 내려 온몸이 으슬으슬한 날씨였는데, 오늘은 날이 참 좋다.
햇살 좋은 날씨. 봄이다. 봄이 느껴지는 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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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
문우당 서림에서 한 시간,
동그란 책에서 십오 분.
아야트 카페를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속초 베이글 집이 생겼다며 쿠폰을 주셨다.
대뜸 "베이글 좋아해요?"라고 말씀하시고는 서랍을 여셔서 베이글을 쥐여 주시려는 줄 알고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기사님이 건네주신 건 쿠폰이었다. 머쓱함도 잠시 마음이 훈훈해졌다. ‘속초 사람들은 다 이렇게 챙겨주시나..?’ 정이 많은 도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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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당은 정말 너무….
너무 좋았는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기억을 톺아보며 하나씩 말해보자면.
문우당은 생각보다 큰 서점이었다는 것과 백 년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점. 직원분들의 큐레이션이 곳곳에 놓여있고, 천정에는 다양한 책의 문장들을 걸어두었다. 이런 세심함을 지나칠 수 없는 사람으로 하나하나 읽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걸어 둔 문장들이 한두 개 좋아야지 몽땅 좋아 버리니 돌아다니면서 천정에 걸린 문장들을 읽기 바빴다. 더불어 문우당 직원분(서림인 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들의 취향에 따른 큐레이션이 잘 되어있어서 다양한 카테고리의 서림인 추천 도서들은 한 번씩 펼쳐보았다. 한 서림인 분의 큐레이션 구간에 있는 책도 하나 샀다. 식물 관련 도서들이 모아져 있던 구간. 식물이라면 좋아하지만 키우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서도 ‘식물’이라는 단어가 보이면 괜히 눈길이 간다.
무언가를 잘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호감이 간다. 그중에 식물이 있다. 주변에 식물을 잘 돌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정갈하고, 단정하다. 돌보는 일은 부지런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어서인지. 그래서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잘 가꾸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편 ‘좋은 사람’ 폴더에 나조차 모르는 새에 들어가 있다. 작은 존경심도 함께.
그렇게 식물 카테고리의 서림인의 추천을 읽고 도서를 하나 집어 들었는데, 원래라면 크게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 같지만 펼쳐 보니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이 한가득이었던 것이다. 지나쳤을지도 모를 책에게 나를 데려다준 셈이 아닌가. 내게 닿게끔 안내해 준 서림인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큐레이션의 선순환은 이런 게 아닐까. 지나칠 수 있는 것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들고, 눈길이 가게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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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당은 머무르는 사람의 흔적 또한 놓치지 않는다.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남기고 간 문장과 마음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게끔 만드는 곳이라고 해야할까. 1층을 둘러보는데 한참이 걸리고 2층으로 올라오니 손글씨로 꼼꼼히 적힌 추천이 눈에 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어서 신기했다. 여기 나랑 비슷한 취향의 서림인이 있구나. 비슷한 취향의 사람이 나와 비슷한 지점을 책에서 느끼고 추천해주는 일을 목격하는 일이 작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이 분과 이야기 나누면 재밌겠다.’는 마음도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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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여행인 만큼 시간이 촉박해서 걸음을 재촉해 동그란 책으로 갔다. 동그란 책은 책이 눈에 띄기보다 공간이 예쁜 곳이었다. 기념품 한두 개 사 오기 좋은 곳. 엽서 몇 개를 품에 안고 나왔다. 아야트 카페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14:20
갑자기 기사님이 ‘언제 제 차 탄 적 있지 않아요?’라고 하셨는데 아쉽게도 난 2년 만의 속초라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말씀드렸다. 속초는 역시 정이 많은가보다. 그렇냐고 하시고는 요즘 젊은 이들이 속초에 와서 고성 근처 카페를 많이들 찾는다고 좋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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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
아야트 커피 도착.
크로플을 시키려고 했는데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시그니처 메뉴로 보이는 흑임자 라테와 휘낭시에 두 개를 시켰다. ‘12,600원 밥 값이긴 하네. 오션뷰 값치고는 저렴한 편 아닌가?’라고 생각하고는 만족하며 마시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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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최미래 작가님의 ‘녹색갈증’ 소설책도 완독했는데 녹색갈증이라는 말이 실제로 있는 단어였음을 처음 알았다.
녹색 갈증 : 자연을 좋아하는 생명체의 본질적이고 유전적인 소양. 초록색이 인간의 눈에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이유도 생명체의 본질적인 유전적 소양에 들어가지 않을까. 이따금 겨우내에 더욱 자주 공허하고, 알 수 없는 갈증이 나는 건 이때문일지 싶다. 초록이 보이지 않아서.
시간별 기록은 여기에서 끝났다.
아마 이후로는 시간이 촉박해서 시간을 볼 틈 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조급함이 몰려와 기록을 멈추고 순간을 만끽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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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트 이후에 간 곳은 태시트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여서 택시를 탈지 걸어갈지 고민 하다가 걷기를 택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바람은 셌지만 견딜 수 있는 정도였으며 바로 또 커피를 마시자니 배부를 것 같았다. 해안가를 따라 바다를 보며 거닐고 싶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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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트 커피도 좋았지만,
태시트는 또 다른 느낌으로 좋더라.
둘 다 좋아하는 사람과 또 오고픈 곳인데 아야트는 꼭 둘이 왔으면 좋겠고, 태시트는 둘이 아니어도 혼자로 충분히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혼자도 섭섭지 않을, 왜인지 충만하게 느껴지던 공간. 휘낭시에도 맛있었고 커피도 맛있었다. 아야트에서 무언가 맛있다는 느낌보다는 경치가 좋다는 느낌이 컸다면 태시트는 공간과 음악, 커피 향기와 휘낭시에까지. 모든 삼박자가 정박에 딱딱 맞춰지는 느낌. 엇박자일지라도 짜여진 엇박자 느낌이라 해야 할까. 참 좋았다. 정말이지 좋았다. 또 찾아갈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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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시트에서는 새로운 책을 꺼냈다. 문우당에서 구매한 책 중의 하나. ‘재즈의 계절.’ 어렵지 않고 쉽게 읽혀서 좋았다. 재즈에 관한 이야기가 얕지도 깊지도 않아서 재즈라는 장르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책이다.
태시트는 서울의 평균적인 카페 마감 시간에 비하면 일찍 영업 마감이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왔다. 당일치기 여행이기에 애초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지만.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선 다시 속초로 가야 했기 때문에 택시를 불렀다. 이번 택시 기사님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 주요 이야기 소재는 고성 산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부지가 모두 타서 지금 밖을 보면 나무가 하나도 없다는 말. 정말 기사님 말대로 나무 한 그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뉴스에서 보았던 것 같은 기억이 스쳤다. 그 산불이 이곳이었구나.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나무라고 볼 수 없이 이곳저곳 검은 재가되고 그을린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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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소는 노웨어.
J가 알려줬던 곳이다. 속초에서 잠깐 살았다던 그가 단골이었을 정도로 자주 갔었다는 곳. 속초에 가게 되면 꼭 가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올 수밖에 없던 곳이다. 내뱉은 말이 있어서 와야만 할 것 같았다. 그저 와보고 싶기도 했고. 이곳의 어떤 것을 그리 좋아했던 걸까 궁금해져서. 분위기, 술, 노래? 무엇이 그를 인도했을까. 단번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노웨어 사장님, 노래를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싶었던 것. 단번에 눈에 들어온 프랭크오션 그리고 턴테이블과 LP. 번쩍이며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미러볼 조명의 불빛과 과 빔으로 쏴 보이던 노래의 뮤비들. 작지만 충만하게 느껴지던 곳. J가 이곳의 어떤 것을 그리 좋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노래하는 J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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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지도 못하는 하이볼을 시키고, 제대로 된 끼니를 못 먹어서 든든한 안주를 시키고 싶었는데 안주다운 메뉴뿐이라 감자튀김을 시켰다. 혼자 먹기엔 양이 많기도 했고 끼니를 때우기엔 영 부족했고, 감자튀김만 먹으니 물리기도 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은 내가 나갈 때까지 온전히 나 혼자였기에 다른 이들을 관찰할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럼에도 혼자여서 책도 눈치 볼 일 없이 읽을 수 있었으니 편안하지 않았나 싶다. 노웨어는 혼자보다 둘이 오고픈 곳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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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났다.
나의 짧은 도피가.
벗어나고픈 일상에서
잠시 도망치기 위함이었던 속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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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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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시트는 고요했고, 아늑했으며 평화로웠다. 앞에는 바다가 있고 무채색 인테리어는 마음을 차분하게 했으며 휘낭시에는 커피에 곁들이기 딱 좋은 맛이었다. 이곳에서 좋아하는 이와 무용한 이야기를 잔뜩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들춰보면서. 이를테면 요즘 가장 인상 깊었던 단어라던가, 음악, 평안을 느낀 순간. 사랑하고야 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나눠서 더 이상 무용하지 않게 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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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의 마지막 장소로 노웨어를 가게 된 일은 j가 잠시 속초에 머물렀던 때 단골 가게였다고 정말 좋아하는 곳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는 꼭 가야지. 하고 저장해 두었던 곳이다. 다 먹지도 못할 하이볼과 안주를 시키고 책을 읽었다. 내가 있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사장님의 선곡, 잘 읽히는 책, 살짝 오른 취기도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 '속초에 좋은 펍 있어?'하고 묻는다면 추천해 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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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역시 한달음에 달려와 기다리던 이를 맞이하는 중년의 모습. 아내인지 연인인지 모를 일이니, 둘의 관계를 알 수 없겠지만 그 표정만큼은 진심이 아닐 리 없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표정. 어떤 마음, 어떤 사랑 일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지치는 것이 아니라 잔뜩 설레게 되는 일. 기다림이야 말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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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와 함께 보내드리는 사진은 모두 개인 소장 가능합니다.
🔖 메일 본문 캡쳐 및 업로드 모두 괜찮습니다.
* 개인 소장이 아닌 업로드 시 출처 기재 부탁드려요. * 저의 글을 소중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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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0월이네요.
20일이 채 안된다는 가을을 부지런히 그리고
풍요롭고 소란스럽지 않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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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보내기 yunsss0930@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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